Episode 7.   Sentences during vacation
1. 시간의 차례

종로를 지나가면서,
버스 차창밖으로
세운상가의 철거예정인 건물들과
그 뒤로 세워지고 있는 신축건물들을 보았다.
내가 저물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이었다.
아빠와 내가 좋아해 자주 걸었던
저 세운상가와 을지로의 낮은 골목들.
아빠의 3-40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종로의 저 어느 편 고층 빌딩들.
그리고
60대가 된 오늘의 아빠.


나는 되도록 그런 것들이
좀 더 오래 곁에 머무르길 바란다.
저문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지나가는 '차례'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때때로
그 일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것일까.
왜 그런 날은
해질녘 저 드높은 건물 틈 사이 기울어진 노을과 
두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일까.

새벽동이 트는 일과
해질녘 노을이 지는 일은 주로 찰나이지만.
을지로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세워지는 일도
평일의 무게가 쌓이면 금세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어차피 그렇게 순차적으로 지나갈 일이라면
아주 조금만 더 천천히 지나가
시간이 지나가는 차례의 쓸쓸함을
조금만 더 오래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2. 컴퍼스 반경

환기가 필요했다.

2주간의 휴가 동안,
익숙하거나 낯선 먼 거리의 동네들을
이렇게 매일같이 산보하는 이유는
정해놓은 몇 정거장의
반경 안에서
매일 거의 비스듬하게 움직이고 제 할 일을 하는
직장인인 그런 평일의 나를,
컴퍼스 지름을 쫙 펴서
몇 발자국만 더 넓게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3. 요란(搖亂)

나는 요란스러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올 해는 크리스마스 전,
정확히 말하자면 이 2주간의 휴가 전,
되도록 미리 모든 만남들을 끝마치려 했으므로.
12월 초부터 다소 한 껏 연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는 모레라는데,
나는 벌써 미리 크리스마스를 다 보내버린 기분.
잠시 생각했다.

연말 선물이며, 카드며, 준비며 하는 동안
드물게 요란법석을 피웠더니
원래 하루치였던 크리스마스가 한 달같이 지나갔다니.

살면서 어떤 순간에는 고요함을 벗어나
다소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일도 꽤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4. 서걱대는 포크질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연희동에 왔다.
지난여름 무렵 이 골목을 걸었을 때는
구석구석 골목을 걸어 다니는 일이 매우 싱그러웠는데.
오늘 겨울 아침의 걸음은 너무 추워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쁨도 잠시
금세 자꾸만 안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조용히 가만히 앉아있고 싶어
골목 제일 고요해 보이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조용한 카페 위로 좋아하는 곡이 나지막이 흐르고 있었다.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추위에 대충 주문해버린, 시그니처 커피와
브라우니 조각이 나왔다.

일단 시켰으니 언 손으로
브라우니 모퉁이 한 구석을 포크로 썰었다.

"서걱-"

선명한 소리가
꼭 유튜브 어디에서 들었던 ASMR 같았다.
이게 나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소리였다니.
별 일도 아닌데 신기해서
입에 넣기도 전에 또 듣고 싶었던 터라,
다른 한 구석을 다시 썰었다.
"서걱- 서걱- 서걱-"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
아침부터 대체 왜 난 여기에 왔을까 싶었던 마음이
브라우니 귀퉁이 써는 소리에 녹아버렸다.
잠시 의심했다.
혹시 평일 오전 호사롭게
돈 팡팡 쓰는 일에 나는 행복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스스로를 의심하던 찰나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이렇게 ASMR처럼 '서걱'거리며 썰리는
브라우니 한 조각에도
금세 녹아버릴 수 있었던
딱 그 정도의 마음들이었는데.
서걱대는 포크질 한 번 할 마음을 못 가져,
이렇게 오래 나는 "퍼석"거렸던 것은 아닐까.
잠깐 커피를 두고 멈춰 섰던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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